2024-05-16T17:43:23
알 따우히드 (하나님의 유일성)는 세계관 입니다. 전통적으로 간단히 말하자면 알 따우히드는 “그 하나님 외에 신神이 없다 “ 는 확신이요 증언입니다. 극도로 간결하고 표면상 부정적인 이 언명은 이슬람 전체에서 가장 위대하고 가장 풍부한 의미를 내포합니다. 때로는 한 문화, 한 문명, 혹은 한 역사 전체가 하나의 문장으로 압축됩니다. 알 따우히드는 일반적인 실체 관, 진리 관, […]
2024-05-15T17:30:54
Originally posted 2023-11-22 14:24:26. 이는 특별한 경우로 남성이 더 많이 받는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남자는 아내와 가족 그리고 가난한 친척을 온전히 부양할 책임을 집니다. 모든 재정적인 책임을 떠맡고 자신에게 딸린 사람을 충분하게 부양하는 것이 남자의 의무입니다. 또한, 자신이 속한 사회적 대의명분을 재정으로 지원하는 것 역시도 남자 의무입니다. 남자만이 이런 재정적 부담을 짊어집니다. 둘째, 이와는 대조적으로 여성은 개인 비용과 사치품을 제외하면 재정적으로 책임이 없습니다. 여성은 재정적으로 안전할 뿐만 아니라 부양을 받습니다. 아내라면 남편이, 어머니라면 아들이, 딸이라면 아버지가, 누이라면 오빠나 남동생이 부양자가 됩니다. 의지할 친척이 없는 경우에는 상속받을 것도 없고 유산을 남겨줄 사람도 없기 때문에 상속 문제가 생기지 않습니다. 그러나 의지할 데 없는 여성이 굶어 죽게 내버려두지는 않습니다. 홀로 남은 여성을 부양하는 것은 사회 전체와 국가 책임입니다. 여성은 도움을 받을 수도, 직업을 얻을 수도 있습니다. 여성이 버는 돈은 당연히 전부 자기 것입니다. 여성에게는 자기 외에 다른 사람을 부양할 책임이 없습니다. 남성은 같은 처지 있더라도, 가족과 도움을 필요로 하는 친척이 있다면 부양할 책임이 있습니다. 아무리 어려운 처지에 있더라도 여성 책임은 한정되어 있는 반면에 남성 책임은 더 큽니다. 셋째, 여성이 남성보다 덜 상속 받는 것은, 일한 대가를 박탈하는 것이 아닙니다. 상속 재산은 노력에 대한 결과가 아닌, 외부로부터 넘어온 가외 재산입니다. 이는 불로소득입니다. 상속 재산은 일종의 도움이므로 이슬람 규정에 따라 다급한 필요와 책임을 고려해 분배해야 합니다. 한쪽에는 온갖 재정적인 책임과 의무를 짊어진 상속자가 있고 또 다른 쪽에는 재정적인 책임이 전혀 없거나 적은 상속자가 있습니다. 만일 여성의 몫을 완전히 박탈한다면, 여성 역시 고인의 친척이므로 이는 부당한 일입니다. 마찬가지로 언제나 여성에게 동일한 몫을 준다면 부양 책임이 있는 남성에게 부당할 것입니다. 이슬람은 남성이 가족의 필요와 사회적 책임에 응할 수 있도록 두 몫의 재산을 상속하게 합니다. 이와 동시에 여성에게도 개인적 필요를 충족하도록 한 몫의 재산을 상속해 왔습니다. 이 점에 있어서 이슬람은 여성에게 더 많은 호의를 보입니다. 여기서 말할 수 있는 것은 전체적으로 보면 여성과 남성 권리와 동일하지는 않지만 동등하다고, 평등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꾸란 4:11 – 14, 176) […]
2024-05-15T17:30:53
Originally posted 2023-11-22 14:24:25. 꾸란과 초기 무슬림들 태도를 보면, 여성이 적어도 남성만큼 생명에 필요한 존재일 뿐 아니라 남성보다 열등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외래문화가 끼친 영향이 아니었다면 무슬림은 이런 질문조차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여성과 남성 지위는 당연하게 동등하기 때문입니다. 이는 당연한 기정사실이었기에 아무도 문제 삼지를 않습니다. 이슬람은 다른 종교나 제도가 결코 허락하지 않았던 […]
2024-05-15T17:30:52
진실한 무슬림은, 하나님께서 올바른 길을 우리에게 먼저 가르치신 다음, 나중에 그 책임을 지게 한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토록 이나 많은 선지자와 계시를 보내셨습니다.
2024-05-15T17:30:50
이슬람의 정치 생활은 사회경제 생활과 마찬가지로 건전한 영적・도덕적 기초에 입각하여, 하나님의 가르침에 따라 인도됩니다. 이슬람 정치제도는 구조와 기능에서 그 목적이 독특합니다.
2024-05-15T17:30:49
하지만 이슬람에서는 인간을 무신론으로 이끄는 일 따위는 하지 않습니다. 사람을 당황하게 하거나 궁지에 몰아넣는 일이 전혀 없습니다. 오직 하나의 신 만이 존재할 따름입니다.
2024-05-15T17:30:48
기독교가 예수의 본래 가르침과 무관하다는 것을 오늘날 사람들이 점점 더 알게 되었습니다. 지난 이세기 동안 역사가들이 연구 한 결과, 기독교의 ‘신비’는 더 이상 믿기지 않았지만, 현 교회에서 말하는 그리스도는 역사 속 예수와 전혀 무관하다는 사실이 증명되었기 때문
2024-05-15T17:30:46
사람이 사는 사회라면 어느 곳이든 절대적 의미의 자유를 누릴 수는 없습니다. 사회가 제 기능을 발휘하려면, 어떤 식으로든 자유에 제한을 가할 수밖에 없습니다.
2024-05-15T17:30:45
잘못된 명칭은 이슬람을 일개 인간에 불과한 무함마드의 이름을 따서 명명하고 이슬람 역시 자유주의, 마르크스주의, 채식주의 등과 다를 바 없는 또 하나의 ‘주의 ism’에 불과하다는 의미를 내포합니다.
2024-05-15T17:30:44
역사적으로 종교는 수없이 이용되고 오해를 받아 왔습니다. 착취와 압제의 수단으로 악용되고, 편견과 박해의 구실이 되는가 하면, 특권층과 백성 모두를 지배하는 권력 수단으로 이용되기도 했습니다.
2024-05-15T17:30:43
Originally posted 2023-11-12 06:18:03. 1.이슬람에는 경건과 정의, 안전과 평화를 유지하는데 필요한 영적 자양분이 있습니다. 이를 사람에게 공급하도록 영적・윤리적 생활을 조직합니다. 이슬람의 영적 생활규정을 충실히 따른다면, 영적 성장과 성숙에 관한 한 가장 긍정적인 결과가 나타납니다.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예배 (2) 구빈세와 자선 (3) 단식 (4) 순례 (5) 샤하다(신앙고백) (6) 하나님과 하나님의 선지자를 향한 사랑. 하나님의 목적과 진리, […]
2024-05-15T17:30:42
Originally posted 2023-11-11 05:37:20. 진실한 무슬림은, 시간을 초월하는 하나님의 지식과 계획을 세우고 실행할 수 있는 하나님의 능력을 믿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에 무관심하지 않으시며 보고 계시지 만도 않습니다. 하나님의 법칙과 힘은 늘 작용하면서 광대한 영역의 질서를 유지하며 우주를 온전히 지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지혜로우신 분으로 늘 사랑하시며, 하시는 모든 일은 반드시 선한 동기에다 그 의미와 목적이 있습니다. 일단 이런 생각을 마음에 새긴다면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비록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다거나, 심지어 그것이 틀렸다는 생각이 들더라도 굳은 신앙심으로서 받아들여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굳게 믿고, 하시는 일이라면 모두 무엇이든 받아들여야 합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인식은 한정되어 있고 우리 생각은 개인적 경험에 바탕을 두고 있는 반면, 하나님의 인식은 무한하며 하나님의 계획은 보편적 차원에서 세우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운명론자가 되거나 무력해지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의 관심과 인간의 책임 사이에 경계를 그을 뿐입니다. 우리는 날 때부터 유한하고, 육신의 제약 속에 태어났습니다. 우리의 능력과 자유 역시 유한하고 제한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인자 하시게도 우리가 하는 일에만 책임을 물으십니다. 우리가 할 수 없는 일이나 하나님께 속한 일은 우리가 책임지지를 않습니다. 제한된 속성과 책임에 맞게 제한된 능력을 우리에게 부여한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한편, 하나님께서는 계획을 수행하실 때 시간을 초월하는 지식과 능력을 지니고 계시지만, 그와 같은 사실이 우리에게 주어진 한계 내에서 우리 스스로 일하는 것을 막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우리 스스로 생각하고 계획세우며 올바르게 선택하라고 권유를 하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바라거나 원하는 대로 되지를 않는다고 해서 신앙심을 잃거나 정신적 긴장, 건강을 해치는 근심, 걱정에 사로잡혀서는 안 됩니다. 한번 해서 안 되면 다시 해 보아야 합니다. 그래도 결과가 만족스럽지 못할 땐, 최선을 다했으니 그 결과에 대한 책임을 물을 수 없습니다. 그러한 경우는 우리 능력과 책임 한계 밖의 일입니다. 오직 하나님께만 관계되는 일입니다. 이것은 바로 정명에 대한 믿음입니다. 바꿔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시간을 초월 하시 노라는 섭리는 세상 현상을 예견하며, 세상 현상은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 정확히 일어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꾸란 18:29, 41:26, 53:33 – 62, 54:49, 65:3, 76:30 – 31) 진실한 무슬림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 만물을 무의미하게 창조하지 않으셨으며, 인생에는 인간 육체적인 필요와 물리적 활동을 초월하는 더 웅대한 목적이 있다고 믿습니다. 삶의 목적은 하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
2024-05-15T17:30:41
Originally posted 2023-11-10 04:29:32. 꾸란과 초기 무슬림들 태도를 보면, 여성이 적어도 남성만큼 생명에 필요한 존재일 뿐 아니라 남성보다 열등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외래문화가 끼친 영향이 아니었다면 무슬림은 이런 질문조차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여성과 남성 지위는 당연하게 동등하기 때문입니다. 이는 당연한 기정사실이었기에 아무도 문제 삼지를 않습니다. 이슬람은 다른 종교나 제도가 결코 허락하지 않았던 […]
2024-05-15T17:30:40
Originally posted 2023-11-09 03:58:31. 바르나바 복음서(Gospel of Barnabas)는 예수께서 메시지를 전달한 약 삼 년 동안 대부분 시간을 그분과 함께 보냈던 한 제자가 기록 한 현존하는 유일한 복음서로 전해집니다. 그러므로 그는 네 권의 공관복음서 저자들과는 달리, 예수와 함께 직접 체험하였으며, 그분 가르침 모두를 알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바르나바스 예수와 그 가르침을 기억하여 적어놓은 것인지, 사건과 설교내용이 일어났던 대로 기록한 것인지, 혹은 예수께서 지상을 떠난 뒤 가르침이 일부 변질되거나 분실될까 두려워 이 복음서를 저술한 것인지에 대하여는 알 수 없지만 그가 요한이나(John), 마가(Mark)와 함께 사이프러스(Cyprus)에서 돌아온 뒤에 이 복음서를 저술했을 가능성이 매우 큽니다. 이 두 사람은 함께 여행을 떠났는데 이때는 예수가 지상을 떠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마가와 함께 가겠다는 바르나바 동행을 할 수가 없다며 거절 한 타르수스(Tarsus)의 바울(Paul)이 이 두 사람과 결별 한 뒤였습니다. 이 복음서가 언제 저작되었건 간에 네 권의 공관 복음서처럼 수 개 국어로 변역 되어 전해졌으나, 적어도 이 복음서만이 예수 생애를 직접 목격한 사람이 적은 내용입니다. 바르나바 복음서는 서기 325년까지 알렉산드리아 지방 교회들이 정경 복음서(Canonical Gospel)로 인정하였습니다. 이 책은 예수 출생 이후 처음 1, 2세기 동안 회람되었다는 사실을 신의 유일성을 지지한 이라네우스(Iraneus)가 적은 기록을 통하여 알 수가 있습니다. 그는 바울이 예수의 본래 가르침에다 이교인 로마 종교와 플라톤 철학을 융합시킨 책임이 있다고 비난하며 그에게 반대했는데 자기 견해를 입증하기 위해 바르나바 복음서를 많이 인용하였습니다. 서기 325년에 저 유명한 니케아 종교회의(Council of Nicea)가 열렸습니다. 삼위일체 교리가 바울 기독교 공식 교리로 선포되었으며, 이 결정 결과, 당시 300권 이상이던 복음서들 중에서 네 가지만이 교회에서 공식으로 인정한 복음서로 선정되었습니다. 바르나바 복음서를 포함한 나머지 복음서들은 모두 완전히 없애버리라고 명령하였습니다. 또한 히브리어로 기록된 모든 복음서도 마찬가지로 없애게끔 했으며 인정받지 못한 복음서를 소지할 때는 누구라도 사형에 처할 것이라는 포고문이 발포되었습니다. 이것은 삼위일체와 모순되는 본래의 예수 가르침을 적은 모든 기록을, 인간 기억이든 서적이든 간에, 모조리 말살하려는 매우 조직적인 최초 시도였습니다. 바르나바 복음서 경우, 이런 명령이 완전하게 성공하지는 않았으며, 이 책이 계속해서 존재했다는 사실을 오늘날까지 전하고 있습니다. 다마수스 교황(Pope Damasus)(304-384 A.D.)은 366년 교황이 되고 난 뒤 바르나바 복음서를 읽지 말라는 칙령을 내렸다고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이 칙령을 395년에 사망한 세사리아(Caesaria)의 주교 겔라수스(Gelasus)가 지지를 하였습니다. 그는 이 복음서를 소위 외경이라는 목록에 포함시켰습니다. 외경(Apocrypha)이란 단순히 “사람들로부터 숨겨진 것”을 뜻합니다. 따라서 이 단계에서는 이 복음서를 일반인이 접할 수 없었으나, 교회지도층에서는 아직도 참고로 할 수가 있었습니다. 사실 그 교황은 383년에 바르나바 복음서 사본 하나를 입수하여 개인 서가에 보관하였습니다. 이 복음서에 관해 또 다른 여러 칙령을 내렸는데, 382년 서로마 교회 칙령으로, […]
2024-05-15T17:30:39
Originally posted 2023-11-08 03:35:45. 바르나바와 초기 기독교인들 바르나바(Barnabas), 혹은 바르나베(Bar-nabe)란 ‘위안의 아들’이나 ‘권고의 아들’을 뜻하는데, 그는 사이프러스에서 유대인으로 출생하였습니다. 그를 또 요세(Joses)나 요셉(Joseph)으로 부르기도 했는데, 새로운 이 이름은 예수 제자들이 붙여준 것입니다. 네 권의 공관 복음서에는 바르나바에 대한 언급이 거의 없지만, 그는 예수가 사라진 뒤 제자들의 한 지도자였음을 신약성서 다른 책에서 명백히 알 수가 있습니다. 누구보다도 예수의 가르침을 고수하려고 부단히 노력했으며, 개혁신자들과 특히 타르수스의 바울에 대해 반대한 사람입니다. 사도행전을 쓴 누가는 바울의 주치의였으므로 바울이 주장하는 견해를 지지했습니다. 이 때문에 그는 바울에 대한 이야기를 설명하면서 바르나바를 꼭 필요한 경우에만 언급했습니다. 불행히도 바울 교회가 삼위일체 교리를 채택한 뒤, 이 교리에 어긋난 모든 기록을 없애려고 ‘사도들 여행기와 가르침서(The Travels and Teachings of the Apostles)’ 를 파손하였습니다. 그런 까닭으로 바르나바와 초기 기독교인들에 관해 알려진 많은 사실이 손실되었습니다. 삼위일체론 자 들이 이런 정책을 펼쳐 예수의 사명 중에 바르나바에 대한 언급이 이상하게도 네 권의 복음서에서 전혀 나오지 않은 것이며, 누가에 따르자면, 예수가 사라진 뒤 누구에게도 못지 않은 중요한 인물이 바울과 불화가 생겨 결별하자마자 역사의 페이지에서 사라진 이유를 설명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바르나바는 예수가 임무를 시작할 때부터 그분과 함께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의 복음서에서 예수에 대한 큰 충성과 사랑을 나타내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바르나바는 계속 예수와 동반하였을 뿐 아니라, 그분 가르침에 열중하였기 때문에 곧 명성을 얻었으며, 사도행전에서는 자기 스승으로부터 배운 것을 남에게 전할 능력이 충분한 사람이라고 분명하게 이 명성을 입증합니다. 제자들이 붙인 이름은 위안과 격려의 근원인 대변인으로서 그의 위치가 어떠했는지를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는 진실하고 관대하였으며 예수를 만난 뒤 소유한 것 모두를 팔아 그분 추종자들에게 쓰라고 주었습니다. 예수와 제자들이 그에게 향한 애정은 그를 칭하는 여러 이름에서도 알 수가 있습니다. 제자들이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은 뒤부터’ 예수와 꾸준히 함께 한 사람들 중에 유다 지방에 사도를 선발하기로 하였을 때, 두 사람을 뽑았습니다. “하나는 바르사바(Barsabas)라고도 하고 별명은 유스도(Justus)라고 하는 요셉(Joseph)이요, 하나는 맛디아(Mathias)라.”(사도행전 1:22-23) 예수께서 살아 계실 때 그분이랑 동반한 사람 중 성경에 언급되어 있는 요셉은 바르나바라고 널리 알려진 사람 말고는 달리 아무도 없습니다. 그리하여 굿스피드가 우리에게 말한 대로, 한 때 극약을 마셨으나 아무런 해도 입지 않은 인물인 바르사바가 바로 바르나바일 가능성이 매우 크고. 만약 그렇다면, 바르나바가 처음 열 두 사도 중 한 사람은 비록 아니었어도, 분명히 처음 70제자 중 한 사람이었다 점은 틀림이 없습니다. 처음 열 두 제자에 적합한 사람으로 여겨야 한다는 주장은 예수의 모친 마리아가 임종하면서 제자들을 불렀을 때 바르나바도 거기에 간 사람이라는 전승으로 뒷받침됩니다. […]
2024-05-15T17:30:38
Originally posted 2023-11-07 02:41:06. 부모와 자녀의 관계 (1) 자녀의 권리: 부모의 의무 자녀에 관한 이슬람 일반관점은 몇 가지 원칙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첫째, 어떤 자식이라도 부모 불행의 원인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 하나님의 언명입니다. (꾸란 2:233) 둘째, 부모는 자녀에게 과하지도 덜하지도 않게 대해야 하며, 자녀에게 해롭게 해서도 안 됩니다. 꾸란은 부모의 과잉보호나 무관심 양쪽모두에 책임 있다는 점을 분명히 밝힙니다. 셋째, 꾸란은 몇 가지 지침을 확립하고, 자녀에 관해 몇 가지를 지적합니다. 자녀란 자만의 근원, 허영과 허망의 씨앗, 고난과 유혹의 원천이기도 하지만 이와 동시에 삶의 기쁨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보다 큰 영혼기쁨을 강조하고, 부모에게 과신하거나 터무니없이 자만하게 하지 말고, 자녀가 저지를지도 모르는 비행을 방지하라고 경고합니다. 이런 입장이 가지는 종교적 윤리원칙은 부모와 자녀를 막론하고 각 개인이 하나님께로 직결되며, 자기 행위에 자신이 책임을 진다는 것입니다. 심판 날 에 자녀가 자기부모를 사면할 수 없고, 부모도 역시 자식을 위해 대신 나설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이슬람은 자녀가 부모에게 절대적으로 의존할 수밖에 없는 사실을 예민하게 인식합니다. 자녀 인격형성에 부모가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전언 자가 말하기를, 아가들은 모두 피뜨라 Fitrah(순수한 자연상태)라는 순수한 자연상태의 본성으로 태어나는데, 부모에 의해 유대교도, 기독교도 혹은 이교도가 된다고 했습니다. 특기할 만한 것으로 이들 지침에 의하면, 이슬람에서 양도 불가능한 자녀권리는 생존과 동등한 삶의 기회도 누릴 권리입니다. 자녀의 생명을 보존하는 것은 이슬람에서 세 번째 계명입니다. (꾸란 6:151, 참조 17:23) 마찬가지로 양도 불가능한 다른 또 하나의 권리는 자녀마다 오직 한 아버지만 있음으로 비롯하는 적출(嫡出)의 권리입니다. 사회화와 양육 그리고 전반적인 보살핌 속에 자녀는 세 번째 권리를 보장받습니다. 자녀를 잘 보살피는 것은 이슬람에서 높이 칭송하는 규범입니다. 전언 자는 아이들을 무척 좋아했으며, 무슬림 공동체가 아이들에게 친절하다는 사실이 다른 공동체 사이에서 알려질 것이라는 확신에 찬 말을 했습니다. 아이들의 영적 복지, 교육 그리고 전반적 안녕은 최우선의 과제입니다. 전언 자 가르침에 따르면, […]
2024-05-15T17:30:36
전쟁으로 인해 남녀숫자가 극심하게 차이가나면 많은 여성들은 생활궁핍과 성적욕구를 이기지 못하여 타락하기 쉽습니다. 그런 경우를 방지하기 위해 일부다처제가 필요합니다. 그렇지만 특수한 상황이라고 해서 사회윤리를 생각하지 않고 과부들이 성적욕구를 해결해야 하겠습니까?